2023. 12. 23., 경북 포항시 남구 효자동길6번길 25-1.

그러면 그 한 줌의 시간을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원래는 기자회견을 가지려 했습니다. 한번 해보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누구를 초대하니 파티룸을 잡니 프로젝터가 있어야 하는게 아니니 말은 정말 많이 했는데 막상 하나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둘 다 엄청 바빴거든요. 둘이 합쳐 17학점이었지만 아무튼 바빴습니다. 그래서 그냥 22일에 친구들 모아서 같이 술이나 마시기로 했습니다. 목, 금요일에만 여는 학교 앞 최애 바를 내가 원하는 날짜에 열 수 있을 때까지 사장님들과 더 친해져보도록 하겠습니다. 술 마시러 간다는 소리로 들린다면 착각입니다.

친구들을 모으는 과정이 순탄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종강 1주 당기자고 하지 않았습니까. 뭔 다들 집에 갔다온대. 다들 안전하고 건강하게 갔다오라지 흥. 어쨌거나 저쨌거나 22일에 포항에 있는 친구들을 모아보니 와장, 헤일리, 썸머, 쩡원이 되겠습니다.

친구들을 모아놓고 고민이 많아졌습니다. 이 사람들과 함께 저녁 식사도 해야하나. 그냥 바를 좀 일찍 갈까. 만날 시간도 정하지 않고 일단 사람부터 모으다니 사람이 참 무책임합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저녁 약속을 따로 잡음으로써 이 무책임함이 더욱 빛나게 되었거든요. 클레임 갔다온다고 늦참하겠다는 헤일리의 죄책감을 덜어줬으니 상부상조인 셈입니다.

이런 식으로 올해의 베타데이는 12월 22일부터 빵빠레 불면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2023. 12. 21., 경북 포항시 남구 청암로 77 기숙사.

빵빠레가 좀 신기하게 생겼네요. 꿈인가? 아닙니다. 생일을 조금 더 즐겁게 즐기기 위한 가니쉬 정도로 생각해야 정신 건강에 좋습니다. 들어가야할 방이 잠겨있어서 사감실에서 마스터키를 받아와야 했고, 첫번째 박스를 옮기는 도중에 카트 바퀴가 빠져버려서 카트가 무용지물이 되었고, 또 마침 들어가는 기숙사 건물이 내부 페인트칠을 당하고 있었지만 별 것 아니라며 웃어보이는게 인생의 묘미 아니겠습니까. 햇빛은 들지도 않으면서 붕어빵 장사로 건물 하나 올릴 수 있을 법한 유동인구를 자랑하는 채광에 마음 한 켠이 또 따뜻해졌습니다. 차오르는 눈물은 분명 페인트 냄새 때문일겁니다.

이사를 즐기다가 약속에 늦을 뻔 했습니다. 행복은 나누면 두 배가 된다던데 아무도 이사를 같이 해주지 않는 걸 보니 옛날 사람들은 거짓말쟁이인가봅니다.

하루 종일 바닷속을 항해하는

2023. 12. 22., 경북 포항시 남구 문예로 130.

저녁 약속은 방송국 선배들과 함께 했습니다. 택시를 같이 타고 같이 해도동으로 넘어가면서 내가 이 사람한테 말을 놓았던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결론을 만들지는 않았어요. 반존대라는 말을 만들어주신 분에게 이 자리를 빌려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스쿠버의 집’에 도착해서 특대 한상을 시켰습니다. 장식이 많아서 좀 많아 보일 수 있는데 실제로도 많아요. 응. 굴이랑 해삼이 참 맛있었습니다. 이에 끼지 않기를 기도하면서 먹는 맛이 있습니다.

끝이 아니더라고요? 저렇게 먹고 나니 뭔가가 더 나왔습니다. 이름 모를 무침에 군만두를 곁들여 먹는 음식이었는데 아직도 이름을 몰라요. 이름을 좀 알려주세요. 맛있었는데 찾아볼 수가 없어요. 냅다 문어랑 배를 무쳤는데 맛있었어요라고 검색할 순 없잖아요. 그리고 독도새우를 처음 먹어봤어요. 크기도 크기지만 새우가 달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습니다. 매운탕도 같이 나왔었는데 기교없이 맛있어서 좋았습니다.

너와 나의 세대가 마지막이면 어떡해

설문대 할망 덕분에 친구가 한 명 더 늘었습니다. 종강을 맞아 집에 가려고 했던 부우는 제주도 상공을 떠돌다가 포항으로 돌아왔다지요. 그리하여 베라보 바에는 쩡원, 썸머, 헤일리, 부우, 와장 그리고 베타가 모이게 되었습니다.

베타는 조금 늦었습니다. 그럴 줄 알았대요.

연말이고 크리스마스 코 앞이라 사람이 꽤 많을 줄 알고 걱정했었는데 자리가 텅텅 비어있더라고요. 고삐 풀린 베타가 뛰어 놀 예정이라고 누가 소문을 냈나봐요. 고삐가 풀리긴 했지만 뛰어 놀지는 않았고요 대신 시험을 조금 봤습니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 불러서 앉혀 놨으니 서로 소개를 시켜줘야 하지 않겠어요? 다섯 명을 소개하면서 다행히 크게 틀린 부분은 없었어요. 틀린 부분이 있었다면 친해지는데 걸린 시간 정도가 있겠네요. 와장이나 부우와 친해지는데 2년 걸렸다는 이야기에 각자의 실망스런 눈초리가 어떤 모양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술을 조금 많이 마셨어요.

거짓말해서 미안해요. 술을 많이 많이 마셨어요. 그 중에서 기억에 남는 술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아구와밤입니다. 이상하게 베라보바에서는 아구와밤이 멸종위기메뉴입니다. 이태원을 한창 들락날락 할 때 배운 술이라 인기가 많은 술인 줄 알았는데 여기서는 아니더군요. 그래서 항상 주기적으로 친구들과 방문해서 베라보바에서 멸종되지 않도록 케어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적어도 베라보바에서는 아구와밤과 각별한 사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무튼. 진탕 마시고 있는데 작은 사장님이 주섬주섬 아구와밤 잔을 꺼내오시더라고요. 그런데 이제 많이 큰. 제 손만큼 컸습니다. 마시는 모습을 영상으로 친구들이 찍어줬는데 차마 아직 재생해보지는 못했습니다.

둘째는 홍화랑입니다. 헤일리 덕분에 그간 참 다양한 술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방송국에서 그녀를 처음 본 이후 친해지면서 최고의 술 친구가 되겠다는 느낌이 찌르르 왔습니다. 아버님의 술을 그녀가 자주 반출해왔는데 하나 하나 다 맛있어서 감사했습니다 아버님. 아무튼 그런 그녀가 이번에는 홍화랑이라는 백주를 가져왔습니다. 본디 중화 술에 관심이 없었지만 조예가 생길 뻔 하게 만들어줬습니다. 53도인 주제에 알코올 향은 하나도 안 나면서 파인애플 향과 산미가 느껴지는 것이 참 벌컥 벌컥 마시다가 쓰러지기 딱 좋은 맛이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곳에 놔두면 진짜 벌컥 벌컥 마실까봐 바에 맡기고 왔습니다.

자정 10초 전에 헤일리가 카운트다운을 해주었고 모든 사람들이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줬습니다. 대면으로 친구들에게 축하를 받은 것은 몇 년만의 일이라 부끄러우면서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생각해보니 고맙다는 말을 못한 것 같더라고요. 고마웠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모든 친구들에게

오로지 내 도파민 때문에 모은 사람들이라 걱정이 많아. 도파민 돌아? 응. 그러면 우리도 좋아.

꽤나 이기적이고 모난 사람임에도 다정한 사람들이 있어서 다행입니다. 생일도 지나 스물셋이 되었는데 언제까지 어리광을 부릴련지. 어리광에 대한 후회를 글에 담는 게 몇 번째인지 잘 모르겠어요. 고마운 일이 생겨도, 슬픈 일이 생겨도, 화나는 일이 생겨도 꼭 저의 어리석음을 탓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친구들에게 어리광 부리지 않기를 새해 목표로 잡았어야 했을까봐요.

다 흘러내릴 것을 알면서도 모래 한 줌을 꼭 쥐어보지 않나요. 그래서 한 줌이라는 말이 시간에도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그 한 줌의 시간을 소중히 하려고.

한 줌의 시간을 소중하게 만들어줘서 고마웠어!


권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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